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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기 교수 당진 소난지도 의병항전 최초 확인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2006-10-10 1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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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문화연구소 독립운동사 학술대회 
20일(목) 10시 30분 문과대 문원강당서 개최 
        

충남 당진군 소난지도 의병항전의 역사적인 사실로 확인되었다. 
  
충남대 김상기 교수(국사학과)는 당진군 소난지도 의병항전이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오는 11월 20일(목) 오전 10시 30분 문과대학 문원강당에서 열리는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의 충청지역 독립운동사 학술대회에서 발표한다. 
  
김 교수는 미리 배포한 발표문에서 최근에는 소난지도 의병의 전투기사표가 발견되어 학술적인 연구의 돌파구가 열리게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김 교수는 또한 이번 당진 소난지도 의병항전을 사실로 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은 여러 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우선, 소난지도 의병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지난 30여 년간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홍원식 의병장 휘하 이름 없는 의병들의 항전과 희생이 소난지도에서 있었음을 역사적으로 실증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소난지도가 1906년이후 내포지역에서 의병 활동의 주요한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906년 5월 홍주성전투에서 패퇴한 맹달섭과 차상길 의병, 1906년 4월 기지시에서 창의한 최구현 의병들이 소난지도로 들어왔으며, 이들이 소난지도에 주둔하고 있던 수원의병과 연합하여 당진 일대에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셋째, 소난지도 인근의 해상이 의병활동의 주무대였음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의병들은 소난지도를 근거지로 하여 인근의 당진·서산·태안 등 내포지역은 물론, 화성과 수원 등 경기 지역에까지 해상으로 이동하면서 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넷째, 소난지도 일대가 活貧黨의 일종인 水賊의 활동지였음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水賊이 1905년 이후에는 의병으로 전환하여 민족 운동을 전개한 구체적인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섯째, 의병장 홍원식이 소난지도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탈출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1910년대 항일운동을 재개하고, 역사적인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제암리교회에서 부인과 함께 순국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섯째, 일본경찰대의 의병에 대한 잔학상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는 선원과 부상당한 의병까지 살육하는 학살행위를 했던 것이다. 
  
위의 내용은 오는 11월 20일 학술회의를 통해 발표된다. <200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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