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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환 교수, 박팽년 영정,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

  • 작성자주우영
  • 작성일2010-01-12 09:01:16
  • 조회수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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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논개 등의 영정도 제작

순천박씨 용모 유전인자 계측도 토대로 제작

 

 

 충남대학교 회화과 윤여환(尹汝煥) 교수(58)가 2년여의 산고 끝에 제작한 박팽년영정(朴彭年影幀)이 2009년 12월 17일 문화체육관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 최종심의에서 표준 얼굴로 통과되어 국가표준영정 제81호(2010.1.5)로 지정받았다.

 

 박팽년[朴彭年, 1417(태종 17)∼1456(세조 2)]은 그의 부친 박중림과 함께 집현전 학사였고, 세조때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평소 가야금 타기를 좋아해 스스로 취금헌(醉琴軒)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는 조상대대로 터를 잡고 살았던 회덕현 흥농촌 왕대벌 (지금의 대전시 동구 가양동)에서 태어났다. 1668년 선비들이 그 집터에 박팽년선생유허비(朴彭年先生遺墟碑)를 세웠는데, 이상한 일은 그 비석에서 지금도 신비의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어 세간에는 당시 풀지 못한 한이 표현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박팽년은 당시 세조의 혹독한 고문으로 8일 만에 옥중에서 殉節(순절)하였고, 멸문지화 중에도 둘째아들  박순의 아내 성주 이씨도 관비가 되어 친정동네인 묘골(하빈면 묘리)로 내려왔다. 그 부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아들을 낳으면 죽음을 당하고 딸이면 관비로 삼게 되어 있었다.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고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서 아기를 바꾸어 키워 아이는 목숨을 보존하였다 한다. 외할아버지에 의하여 朴婢(박비)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키워진 이 아이가 17세가 되었을 때 그의 이모부 이극균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처가에 들렸다가 성장한 그를 보고 자수할 것을 권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사육신들에 대해 옳은 일을 했다는 여론이 일고 있어서 임금을 찾아가 박팽년 선생의 자손임을 이실직고하였다. 성종은 크게 기뻐하면서 특사령을 내리는 동시에 이름도 일산(一珊)으로 고쳐 주었기에 하빈면 묘골이 충절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 받아 종택을 짓고 묘골에 정착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사육신 여섯 가문 가운데 유일하게 대를 이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朴一珊)이며 묘골 순천박씨 입향시조가 되었다.


 박팽년영정의 얼굴은 순천박씨 용모 유전인자 계측도를 토대로 제작되었다. 윤여환 교수는 2008년 11월부터 박팽년의 얼굴 특징을 찾아내기 위해 ‘얼굴 연구소’에 의뢰해, 박팽년의 직계후손들의 집성촌인 달성군 하빈면 묘리를 중심으로 순천박씨 문중얼굴을 촬영, 순천박씨가 가지고 있는 동일형태의 용모 유전인자를 분석한 계측도를 모본으로 하여 박팽년선생의 고결한 학자적 품격과 충절의 기상을 담아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박팽년영정의 의상과 색상은 당시 고증에 따라 재현하였다. 아청색(鴉靑色) 비단으로 만들어진 단령(團領)은 깃이 완만하게 패이고 깃 너비도 좁다. 단령 안에는 붉은색 철릭(帖裡)과 청색 답호(褡 )를 받쳐 입었다. 이러한 복식은 출토복식연구소에 의뢰 해, 당시와 가장 가까운 출토복식 중에서 호조판서 임백령(.?~1546), 판결사 김흠조(1461~1528), 변수(1447~1524) 등의 출토복식을 재현해 제작하였다.

 

 박팽년영정의 사모와 사모날개 등은 신숙주영정에서만 볼 수 있는 가늘고 긴 형태가 보편성이 결여 되어있고 다른 영정과 일관성이 없어 결국 이색, 황희, 하연, 정몽주영정 등에 그려진 형태를 따랐다.


 박팽년선생은 최종 관직이 형조참판과 중추원부사이었고, 사후 영조 때 이조판서로 증직되었으므로 문관2품에 속한다. 따라서 운안흉배와 소금대를 착용하여야 하나 당시의 관례에 따라 한 직급 낮추어 신숙주(1417~1475)영정과 장말손(1431~1486)영정의 백한흉배를 참조하여 제작하였다.

 

흉배제도는 단종 2년(1454)에 검토관 양성지(梁誠之)의 제의로 제정하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흉배를 가슴에 꽉 차게 넣었으며 단령에 직접 은사(銀絲)로 짜 만들었다.


 조선초기 흉배양식은 상서로운 구름무늬 밑에 산초나무에 좌우로 서 있는 백한(白鷳)을 그려 넣었다. 삼국사기 등 옛 기록에서 상서로움의 상징으로 보았던 흰 꿩인 백한은 행동거지가 한가한 까닭에 한(鷳)이라 하였고 성품이 꼿꼿하여 선비의 기개를 표현하는데 적합했다. 선비는 임금에게 꼭 필요한 존재지만 손아귀에 넣고 함부로 할 수는 없다. 바른 말로 임금을 보필하되 굳은 지조를 지켜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정신을 꿩에 담아 폐백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박팽년영정의 대(帶)는 삽은대(鈒銀帶)를 착용하였는데 백한흉배로 된 윤중삼(尹重三, 1563~1618), 이사경, 장유영정 등에 그려진 삽은대를 참조하였다. 

 

 박팽년영정의 족좌대와 백목화(白木靴)는 조선초기영정들의 특징을 살렸고 의습선도 개국초기의 기상을 보여주는 듯 직선적인 표현이 많아 그 표현방식에 따랐다.

 

 박팽년영정의 표현기법은 조선시대 초기영정양식으로 제작되었는데, 비단(畵絹) 뒤에서 칠하는 배채법(背彩法)이 적용되어 비단의 결을 살리면서 색이 발현되도록 하였고,  얼굴 살결무늬를 그리는 육리문법(肉理紋法)등을 활용하고 머릿결과 수염 등을 작가 자신의 기법으로 개발한 적선법(積線法)으로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얼굴표정에서 배어나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기상과 정치하고 부드러운 피부질감이 잘 나타나도록 하였다.


 박팽년영정의 표정과 자세는 학자적 품격과 충절의 기상이 서린 모습의 전신교의좌상으로 가로 110cm, 세로 180cm 크기의 견본채색 작품이다.


 박팽년표준영정은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육신사기념관]에 봉안되고 전시될 예정이다.

 

 윤여환 교수는 그동안 박팽년영정 뿐만 아니라 유관순열사, 논개, 정문부장군, 백제도미부인, 조헌장군 전신상 등 국가표준영정과 김극희, 김함, 임상옥영정 등과 영화 <스캔들>의 숙부인 전신상도 제작하였다. 2007년에는 한국과·싱가포르의 전통혼례의상 8종을 제작했는데, 고증을 거쳐 한.싱 공동우표그림으로 제작하여 240만장이 발행되기도 하였다. 윤 교수는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출신으로 국전에 4차례 특선 수상과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하였고 18차례 국내외 초대 개인전과 미술세계작가상을 수상하였으며, 1991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양그림 특별전에 초대되는 등 독특한 전신화법을 구사하는 사색의 염소작가로도 유명하다. 특히 그의 염소그림은 최근 네이버 [오늘의 미술]에 선정되어 네이버캐스트 백과사전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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