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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보물을 선물해준 그 곳

  • 작성자이경희
  • 등록일2009-05-28 12:05:14
  • 조회수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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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보물을 선물해준 그 곳

아프리카

AFRICA

                                        김동진 르완다 7기단원(경북대학교)

"It"s amazing."

 대학교 교환학생 담당 교수님께서 나의 이력서를 본 뒤 처음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곳에 가는 게 힘들지 않았냐?"고 물어보시며 1년 동안의 아프리카 해외봉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셨다. 나는 "처음 마음을 결정할 때는 겁도 나고 힘도 들었는데 갔다 온 지금은 너무 좋았고, 잊을 수 없는 곳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2주 뒤 나는 Indiana University of Pennsylvania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갈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내가 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르완다에 있었을 때, 르완다에서 일하는 한국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르완다 사람들은 참 게으르고, 내일에 대해 걱정도 안 해서 저축도 하지 않고, 일도 느리게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어느 부분은 공감이 갔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한 가지 질문이 올라왔다. "한국 사람들은 일도 빨리하고, 내일을 위해 저축도 하고, 투자도 하고, 아주 성실하지만, 과연 르완다 사람들만큼 행복한가?" 그랬다. 내가 있었던 그곳, 아프리가 르완다에는 한국처럼 많은 것이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곳에는 행복이 있었다.

 처음 아프리카에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에는 겁이 많이 났다. 내가 생각하는 아프리카는 코끼리와 기린이 도로변에 있고, 사람들은 흙집에 살며, 배가 볼록 튀어나온 하얀 눈의 까만 아이들이 있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말라리아도 무서웠고, 특히나 에이즈도 많이 무서웠다. 하지만 마음 깊이 내 젊음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남들처럼 도서관에 박혀서 토익이 내 삶의 전부인 양 공부하는 20대가 되기 싫었고, 취업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도 되기 싫었다. 이념, 피부색, 언어 등 모든 것이 다른 그곳에 가서, 모든 것을 초월해 내 삶의 한 부분에 아프리카를 남기고 싶었다.

르완다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 내 고정관념들은 깨지기 시작했다. 얼룩말과 기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도로에는 BMW와 벤츠가 있었고, 흙먼지가 날릴 것 같았던 도로에는 잘 닦여진 아스팔트가 있었다. 그리고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해서 무식할 줄 알았던 르완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4개 국어를 했다. 그것뿐 아니라 르완다에서 1년을 살면서 내 모든 고정관념들은 깨졌다. 한국에서 살 때는 많이 가져야 행복한 줄 알았다.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음식을 먹고∙∙∙그래야 내가 남보다 우월하고 행복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르완다에서 나는 가진 것 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행복을 느낄 수 있었고, 인터넷이 안 되고 핸드폰이 없고 게임도 없는데도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구멍가게에 들어가 "만지다"라는 100원짜리 맛없는 빵을 얻어먹을 때에도 말할 수 없이 즐거웠고, 집에 오는 길에 옥수수 하나를 따서 14명이 나눠먹으면서도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길거리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한국에서는 한 개에 6000원이 넘는 아보카도를 따와서 몰래 먹을 때에도 정말 행복했다. 다 떨어진 슬리퍼를 노란 테이프로 칭칭 감아 신고 다녀서 아프리카 사람들조차도 나를 한심하게 쳐다볼 때도 나는 행복했다. 정말 삶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다. 정말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것을 잃을 걱정도 없었고, 복잡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는 내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욕심을 내고 살아가다 보니 점점 욕망만 커져 가는 삶이었는데, 르완다에서는 내게 필요한 양만큼만 가지고 사는 담백한 삶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보낸 날들은 내 모습을 제대로 보는 시간도 되었다. 나는 내가 참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 아프리카까지 가서 그곳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주고 온다는 생각에 스스로 "너는 대단해"라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서 보니, 나는 참 이기적이고 나만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다가 누가 너무 못하면 짜증을 내고 대충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내 속에 있는 오만함은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기 일쑤였고, 때로는 현지 봉사자들과 다툼을 하고 말도 안 하고 지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나는 너희보다 잘 났어"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무시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는 참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내 생각만을 믿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어려운 형편에서는 내 이익부터 챙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곳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러 간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정말 소중한 가치를 그들에게 받으러 간 사람이었다.

 르완다 현지 봉사자 중에 시장에서 짐을 나르는 일을 하는 테오네스테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짐을 차나 집까지 날라다주고 고작 100원에서 200원 정도의 삯을 받았다. 우리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환송식을 할 때, 그는 작은 가방에서 봉사자 한 명 한 명을 위한 선물을 꺼내주었다. 테오네스테는 그 선물을 사기 위해 매일 일해서 번 돈을 모았던 것이다. 한번은 기회가 되어 멕시코에서 온 오말이라는 봉사자와 케냐 나이로비를 출발하여 탄자니아 므완자를 거쳐 르완다 키갈리로 오는 무전여행을 했다. 그 시간은 정말 보물 같은 시간이었다. 침낭 하나에 딱 필요한 것은 옷가지와 여권이 내가 가져간 전부였다. 여행은 매순간 두렵고 겁도 났지만, 매순간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정말 내가 만난 어려운 순간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탄자니아에서 어떤 분이 살아 있는 닭을 선물로 준 일, 그 닭을 팔아서 한 끼의 밥과 한 그릇의 수프로 바꾼 일,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빅토리아 호수를 가로지르는 배를 공짜로 탄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에 돌아와서 한국 라면을 끓여먹었던 일∙∙∙ 그 순간순간들이 나에게는 보물과 같다.

 그렇게 나는 1년 동안의 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꿈꿔왔던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신청했다. 신청서를 낼 때 약간 겁이 났다. 학점도 그다지 좋지 않았고 토플 점수도 겨우 커트라인을 넘겼기 때문에 "될 수 있을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특히 신청자가 모집 인원보다 많아서 긴장이 많이 되었다. 인터뷰가 있던 날, 교환학생 프로그램 담당 교수님은 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읽으시다가 깜짝 놀라며 내게 아프리카에 대해 물어보셨다. 나는 내가 1년 동안 느낀 것들과 배운 것들을 짧게나마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2주 후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프리카에 다녀온 뒤, 많은 사람들이 영어는 많이 늘었냐고 물었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속이 상했다. 단지 영어 공부, 그것만으로 아프리카에서 보낸 1년의 삶을 정의해버리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많이 상했다. 한 번씩 나는 내가 아프리카에 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다른 누군가처럼 독서실에서 토익 공부를 하면서"행복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고민하면서 살아갔을지 모른다.

 나는 아프리카를 위해서 무엇인가 주러 갔지만 결국 받아오기만 했다. 그들의 군더더기 없는 삶에서 나는 정말 행복했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동안 한국에서의 삶이 얼마나 나를 힘들게 몰아갔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환학생이라는 선물도 덤으로 받았다. 아프리카에서의 1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에 온지 이제 두 달이 지나가고 있다. 그곳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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